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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 옥산 세심마을
최고관리자 조회수:14030 119.149.104.162
2012-10-24 05:02:22

옥산 세심마을

때는 바야흐로 1994년, 어느 초등학교의 교실이 시끌시끌하다. 다른 학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데, 왜 우리 학교는 경주에 가느냐며 반 아이들이 역정을 낸다. 그들의 작은 뒷말은 ‘비행기 타고 싶었는데…’ 그렇게 경주는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만든 곳으로 본인을 포함한 여러 학생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경주의 또 다른 모습, 고즈넉한 세심마을

경주와 인연은 약 15년이 지나 여행 중 경유지로 다시 이어졌다. 버스 정류장 뒤에 고분이 있고, 버스 창밖으로는 신라시대 연못 정원 '안압지' 풍경이 보이니, 경주는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었다. 경주는 자연스레 단골여행지가 됐고, 점점 경주 외곽으로 눈길을 돌리던 중 '세심권역'이란 입간판을 따라 산에 가려진 마을로 향했다.

도덕산 기슭에서 내려다 본 세심마을

자옥산과 어래산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가면,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세심마을이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 선생과 연관이 깊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방 4현, 조선 5현, 성리학 6대가 등으로 꼽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학문은 훗날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학풍의 뼈대가 되며, 그를 기리는 서원은 사액을 받기도 했다.

넓지만은 않은 마을, 주위가 온통 산이다. 북쪽으로 도덕산, 동쪽으로 화개산, 서쪽으로 자옥산이 솟았다. 위치는 경주의 중심부에서는 꽤나 떨어진 자리. 마치 자연을 벗 삼아 조용히 사는 사람들의 보금자리임을 드러내는 듯하다.

마을 초입에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나면 옥산서원이다.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며 이언적과 옥산서원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이라 조금 어수선하지만 서원을 둘러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어요. 오히려 지금은 역락문이 열려 있어 좋은 때에 오신 거예요” 운 좋게 서원의 입구인 역락문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서원에서 공부하고 계곡에서 마음 씻고

사적 제154호 옥산서원은 1573년에 이언적을 모시고 그의 학통을 이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후 1574년 선조로부터 '옥산'이란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거듭난다.

역락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무변루가 일종의 담장처럼 버티고 있다. 휴식을 취하는 공간임에도 창이 닫혀 있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 높이의 무변루 아래를 지나자 서원의 강학당과 동재 서재가 드러난다. 전학후묘 배치를 이뤄 다른 서원과 크게 다른 구조는 아니지만, 서원의 중심부의 공간감은 자로 잰 듯한 비례가 돋보이며 분위기는 상당히 폐쇄적으로 느껴진다. 당시 이 서원은 규율과 위계가 엄격했으며, 좋은 풍광을 지닌 자리지만 공부에 집중시키기 위해 외부와 접촉을 줄이며 강학이 이뤄졌다고 한다.

서원 앞 계곡이 흐른다. 한 바위에 세심대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언적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세심이란, '마음을 씻다'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도 이 바위에서 비롯됐다. 낙폭은 그리 크지 않지만 층층이 형성된 암석 한편에서 물줄기가 유유히 흐른다. 주위에 수풀이 무성하고 평평한 바위에 그늘이 졌으며 그 옆으로 작은 폭포수가 떨어지니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운치다. 폭포 앞으로 놓인 외나무다리, 꽤 아슬아슬한 맛이 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뒤를 돌아보면 인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기암 계곡과 외나무다리 그리고 옥산서원이 한 폭의 그림처럼,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출사를 나온 사람들도 이곳을 즐겨 찾지만, 나뭇잎이 떨어질 즈음이면 그림을 그리러 오는 사람들의 명당이 여기라고 한다.

“이 다리를 지나면 옥산정사와 독락당이 있어요. 이언적과 그의 첩이 함께 지냈던 곳인데, 서자인 이전인이 태어난 곳이죠. 학문에 밝았고 효심도 지극했던 이전인이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회재의 대를 잇지 못했어요. 그래도 이전인은 유배지에서 죽은 아버지를 위해 서원 건립에 온 힘을 쏟았다고 해요”

외나무다리 건너 만난 서자 이전인

옥산정사 앞, '잠계 이전인 기적비' 설명문에서 이전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언적이 강계 적소(유배지)에서 1553년 11월 23일 63세로 역책(학덕 높은 사람의 죽음)하시니, 이에 이전인이 직접 운구를 했으나 한양에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있어 동해를 따라 함경도, 강원도로 운구해 약 3개월 만에 고향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의 효심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옥산서원이 사액서원이 되고,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되며 여러 국난 속에서 지금까지 모습을 유지하는 데에는 이전인의 효심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이언적은 1514년에 문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랑, 장령, 밀양 부사 등을 거치며 높은 벼슬로 올랐다. 옥산정사의 안채와 행랑채가 만들어진 1515년의 이언적은 요즘 말로 잘나가고 있었다. 이후 1532년 벼슬에서 쫓겨난 이언적이 지은 사랑채가 독락당이다. 41살부터 약 7년 동안 독락당에서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과거급제 1년 후 지어진 안채와 행랑채 그리고 독락당…, 옥산정사에선 이언적의 희비가 건물로 드러난다.

'홀로 즐기다'라는 뜻을 가진 독락당. 송나라의 사마관이 낙향해 은거하면서 만든 '독락원'이 비슷한 사례라고 한다. 또 벼슬에서 쫓겨난 마음이 드러난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언적에게 혼자만의 공간, 시간이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했겠다.

외삼문을 지나면 낮은 자세의 'ㅡ'자형의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 오른편, 작은 문을 통해 독락정을 볼 수 있는 계곡으로 이어진다. 골목처럼 만들어진 담장과 담장 샛길, 기울어진 향나무가 눈길을 끈다.

계곡물에 비친 독락당, 이언적 선생이 저곳에 있는 듯하다

좁은 샛길 지나 펼쳐진 비밀의 계곡

담장 샛길과 이어진 돌계단 너머 돌다리가 놓였다. 어래산과 도덕산 사이 옥산지에 고였던 물이 옥산천으로 흐른다. 산기슭에서 내려온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계곡에 고였다. 적당히 그늘진 돌계단과 계곡 건너 넓은 바위를 둘러보니 잠시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물살이 거칠지도 않고 깊은 곳은 성인 무릎까지 잠기는 정도여서 가볍게 바지를 걷어 올리고 발을 담갔다.

긴 기둥이 받치고 있는 독락당. 색다른 그림으로 눈에 들어온다. 균형과 비례, 폐쇄적 분위기의 옥산서원을 보고 와서일까. 담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채가 계곡으로 개방된 모습은 일종의 파격으로 다가온다. 내부와 외부 사이 모호한 경계 위에 만들어진 독락당, 이언적의 복잡했던, 어디 둘 곳 없었던 마음이 아니였을까.

계곡 가까이 지어진 정자 같다 해서 독락당은 '계정'으로도 불린다. 계곡에서 보이는 독락당은 3칸 중 2칸은 대청, 1칸은 방으로 구성된 'ㅡ'자형 건물 같지만, 실제로는 'ㄴ'자 형태의 건물이다. 그런 면에서 옥산정사의 사랑채이기도, 자연과 하나가 된 계정이기도 한, 두 가지 모습의 매력을 지녔다.

배움과 감동을 끝없이 선사하는 경주여행, 돌아가는 길에 독락당 옆 계곡에서 잠시 쉬어가면 좋겠다. 자연에서 배우라는 이언적 선생의 가르침이 있고 세심대를 흐르던 자계천은 가슴으로 들어와 마음을 씻겨준다.


 

여행정보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영천IC → 4번 국도 → 영천 → 28번 국도(안강 방면) → 세심마을

※ 위 정보는 2012년 10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글·사진
안정수 기자 / 한국관광공사 (http://korean.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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